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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도 가끔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통 찻집에서 맛 좋은 꽃차를 팔다가 경쟁 찻집의 고발로 영업정지를 당했다는 이야기나, 식용으로 쓰여온 꽃임에도 현행법상 유통하면 위법이라는 사실에 답답해하는 생산자들의 목소리였습니다. 해외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식품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생 식물의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임야를 가꾸게 되면서, 이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저 자신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 소유의 산에서 나는 자생 산야초를 5년 가까이 달여 마시며 건강을 회복했고, 그 유익함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피해자도, 부작용을 겪은 사람도 없음에도 이를 정당하게 식품으로 유통할 방법은 전무합니다. 행정청의 '식품원료 목록'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자생 자원을 활용하려는 선한 의도가 하루아침에 범법 행위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뒤르켐이 말한 '사회 결속을 위한 규범'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관료적 진입 장벽으로 변질되는지 뼈아프게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내 산의 풀 한 포기가 '위험물'이 된 날

    몇 년 전 저는 인연이 닿아 임야를 매입했습니다. 자연과 숲을 좋아하던 터라 그 산을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는데, 어느 날 숲 속에서 고문헌과 실증 자료를 통해 예로부터 쓰임새가 전해 내려오던 자생 식물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가볍게 달여 요리의 육수로 활용해 보았습니다. 국물이 놀랍도록 시원하고 담백했을 뿐 아니라, 마신 뒤 몸이 따뜻해지며 순환이 원활해지는 느낌이 뚜렷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희 부부는 그 식물을 달인 물을 일상의 음용수로 삼았고, 수년간 겪어오던 만성적인 소화기 불편이 가라앉으며 눈에 띄게 건강해졌습니다. 5년 가까이 매일 물처럼 마시며 몸소 안전성을 체감한 셈입니다.

    이 가치 있는 경험을 이웃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내가 소유한 산에서 자란 자연물을 정당하게 식품으로 알리고 유통하는 것, 그것이 결코 과한 욕심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정 기관에 확인한 결과 거대한 제도적 벽에 부딪혔습니다. 해당 식물은 '식품원료 목록'에 등재되어 있지 않아, 식품으로 유통하거나 판매할 경우 위법이라는 답변이었습니다. 여기서 식품원료 목록이란 행정청이 식품 제조에 적합하다고 공식 인정한 원료만 올려두는 허용 목록으로, 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원료는 원칙적으로 상용화가 금지됩니다.

    새롭게 등재를 신청하려면 공인된 독성 검사를 포함한 안전성 입증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 비용만 최소 1억 원이 훌쩍 넘는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내 산에서 자란 식물이, 단지 관료의 서류 목록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유통 불가의 위험물'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약: 5년간 가족이 직접 마시며 안전성을 체감한 자생 식물이지만, 단지 행정 허용 목록에 없다는 이유로 식품으로 유통할 수 없고, 이를 개인이 직접 입증해 등재하는 데에는 1억 원이 넘는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국가적 월권 — '보호'라는 이름의 독점

    통상적으로 국가는 사전 규제를 촘촘히 짤수록 국민이 안전해진다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규제 목록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런지 의문이 남습니다. 현행 식품원료 목록에는 과다 섭취 시 부작용이 있거나 반드시 열처리를 거쳐야만 안전한 식물들도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지 과거부터 써왔다는 '관습적 이력' 덕분에 등재된 경우가 많으며, 시민들은 오랜 세월 축적된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통해 그 위험을 스스로 조절하며 지혜롭게 섭취해 왔습니다. 여기서 집단 지성이란 한 사회가 오랜 실증과 경험을 통해 공유하게 된 실용적 지혜의 총체를 말합니다.

    반면 행정 목록에 오르지 못한 자연 물질 중에는, 이미 등재된 원료보다 훨씬 안전하고 유익한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국가가 국민의 식생활을 철저히 통제하고자 한다면, 무엇이 실질적으로 안전하고 유익한지 직접 조사하고 규명할 행정적 역량과 책임을 먼저 다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행정청 스스로 연구 역량과 비용을 온전히 감당하지 않은 채, 일단 '선제적 전면 금지' 조치를 취하고 1억 원에 달하는 안전성 입증 책임을 오롯이 민간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법학에서 경계하는 국가적 월권(Ultra Vires)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피해자 없는 범죄 논쟁에서 뒤르켐적 시각은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국가의 강력한 규범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되물어야 합니다. 그 규범을 정하고 강제하는 국가와 행정 조직은 과연 완전무결한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식품원료 목록 운영 방식을 직접 확인해 본 제 입장에서는, 그 대답이 결코 '그렇다'가 아니었습니다.

     

    • 식품원료 목록에는 가공 방식에 따라 독성이 있는 원료도 관습적 사용 이력을 근거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미등재 원료의 신규 승인을 위한 독성 검사 비용은 건당 1억 원을 웃돌아 개인에게 심각한 진입 장벽이 됩니다.
    • 국가는 자체적인 실증 검증을 회피한 채, 입증 책임을 전액 개인에게 전가하는 행정 편의를 취하고 있습니다.
    요약: 불완전한 국가가 '보호'를 명분 삼아 개인에게 1억 원의 입증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명백한 국가적 월권입니다. 이는 뒤르켐이 상정한 도덕적 규범론이 현실에서는 관료적 권력 독점으로 변질된 사례이며, 국가 무오류성을 전제로 한 '피해자 없는 영역'에 대한 과도한 처벌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사유재산권 침해 — 내 땅의 풀을 쓸 수 없다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유론(On Liberty)』에서 타인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국가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해악 원칙이란 개인의 행위가 타인에게 구체적인 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공권력의 개입이 정당화된다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 원리입니다.

    제 경우에 대입해보면 논리는 단순합니다. 저는 제 소유의 임야에서 자라는 식물을 달여 가족과 함께 마십니다. 다친 사람이 없습니다. 민원을 제기한 이웃도 없습니다.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행정 목록에 없다는 이유 하나로 이를 상업적으로 나누는 행위에 대해 무거운 형사 처벌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사유재산권(Property Rights)이란 소유자가 자신의 정당한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 및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제가 소유한 산에서 나온 자연물을 활용할 권리는 사유재산권의 본질에 해당합니다. 식품위생법상 허가받지 않은 원료로 가공, 유통할 경우 형사처벌을 규정하고 있는 현행 제도 아래서, 국가가 '목록에 없다'는 형식적 이유 하나로 이 권리를 전면 차단하는 것은 사유재산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입니다.

    뒤르켐 측 논리라면 "사전 검증 없이 유통하면 사회 전체에 잠재적 해가 될 수 있다"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축적된 실증적 경험이 막대한 행정 검사 비용 뒤에 가려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국가가 그 판단을 내리는 기준 자체가 '실제 안전성'이 아니라 '행정 편의를 위해 작성된 목록'이라는 경직성에 머물러 있다는 점입니다.

    요약: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적 활용과 유통까지 과도한 형벌권으로 제한하는 것은 사유재산권 침해이며, 실질적 안전성 검증이 결여된 행정 목록 편의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재단하고 있습니다.

     

    집합적 규범 — 다수의 불쾌감이 처벌의 근거가 될 때

    뒤르켐이 제시한 집합적 규범(Collective Norms)은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행동 기준과 도덕적 감각의 총합을 뜻합니다. 그는 이 규범이 무너질 때 사회적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지는 '아노미(Anomie)' 상태가 도래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규범이 전무한 상태에서 개인이 표류할 수 있다는 점은 일정 부분 타당하며, 그 공허함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전제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 기초하고 있으며, 인류가 자생적으로 질서를 만들어온 역사를 간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국가와 관료 조직이 내리는 집합적 결정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온전하며 무오(無誤)한가? 현실에서 집합적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실체는 때로 오랜 집단 지성이 아니라, 관료제의 행정 편의를 위해 설계된 경직된 진입 장벽에 불과했습니다.

    형법학에서 오랜 논쟁거리인 이른바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담론에서도 이 모순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타인에게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사회의 집합적 감정이 용인하지 않는다"는 추상적 도덕률이 처벌의 근거가 될 때, 그것이 진정한 공익 수호인지 아니면 다수의 불쾌감을 법으로 강제하는 국가적 월권인지 경계가 흐려집니다. 과거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이나 자기 결정권에 속하는 영역을 형벌로 옭아매던 제도들이 훗날 기본권 침해로 폐지되었듯, 집합적 감각과 행정적 판단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식물 원료 규제와 관련하여 제가 직접 마주했던 현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행정 목록에 허가받지 않은 것은 잠재적 위험이다"라는 단편적인 가정이 개인의 재산권과 5년간 축적된 실증적 경험을 일거에 무력화했습니다. 뒤르켐은 규범이 잘못되었다면 합의를 통해 수정해 나가면 된다고 보았지만, 그 목록 하나를 수정하고 입증하는 데 1억 원에 달하는 비용이 드는 구조라면 그것은 사회적 규범이 아니라 '제도적 봉쇄'입니다. 과연 국가는 무결하고 전적으로 이로운 규범만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인지, 그 규범의 오만함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입니다.

    요약: 집합적 규범이 실질적 피해가 아닌 행정 편의나 관료적 잣대로 작동할 때,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피해자 없는 범죄는 왜 처벌받는 건가요?

    A. 일반적으로 사회 결속과 규범 유지를 위해 직접적 피해자가 없어도 처벌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뒤르켐 계열의 논리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현대 법철학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자율적 영역까지 과도하게 형벌권으로 개입하는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크며, 실제로는 관료적 편의를 정당화하는 데 쓰일 위험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Q. 식품원료 목록에 없는 식물을 개인이 먹으면 불법인가요?

    A. 직접 채취해 본인이나 가족이 자가 소비하는 행위 자체는 규제 대상이 아닙니다. 문제는 타인에게 판매하거나 유통할 때 발생합니다. 식품원료 목록 미등재 원료를 식품 제조나 유통에 사용할 경우 식품위생법 위반에 해당합니다. 신규 등재를 받으려면 독성 검사를 포함한 안전성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입증 비용이 개인에게는 사실상 넘기 어려운 장벽입니다.

     

    결론

    뒤르켐의 말처럼 규범 없는 사회는 위험합니다. 그 전제는 저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규범을 설계하고 강제하는 주체가 무결하지 않을 때, '사회 보호'라는 명분은 순식간에 관료적 권력 독점의 언어로 바뀝니다. 제가 직접 겪은 1억 원짜리 장벽이 그 증거였습니다.

    피해자가 없는 영역까지 국가가 형벌로 억압할 수 있다는 논리는, 역사적으로 국가 권력이 소수의 이견과 시민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도구로 오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논리의 구조는 언제나 같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자율을 통제할 자격을 갖추려면, 최소한 자신이 통제하는 영역을 면밀히 판단하고 책임질 역량부터 먼저 갖춰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밀이 역설한 대로 과도한 처벌 권한을 내려놓고 개인과 집단 지성의 힘에 맡기는 편이 훨씬 성숙한 사회의 길일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8azafR8HiE